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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협력과 한미동맹

힘내라 대한민국2 - 노재환(본지 사장 / (학교법인) 삼산 승영학원 이사장)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한국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UN군과 북한 공산군 및 중공군 사이에 정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휴전에 들어갔다.

바로 그 해 8월 8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가조인되었고 53년 10월 1일 정식 조인 되었으며 그 다음해 54년 11월 18일부터 발효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전쟁 당시 30만 명까지 증가되었던 미군은 3만 7000명 선으로 유지 되었으며 규모는 계속 줄어 최근에는 2만 2천여 명 이상을  유지키로 했다.

1978년 11월에는 한미 연합 사령부가 창설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최근 지소미아 종결 통보로 인해 국내 여론은 물론 일본, 미국 등 우방 동맹국들에게 매우 큰 충격을 주었다. 미 폼페이오 장관은 강한 우려와 실망을 나타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 피해 보상의 문제로 대법원 판결 이후 일본은 이 문제를 무역 보복으로 대응했으며 이로 인해 한일간의 대결이 해방 후 최악의 사태를 맞게 되었다.

작금의 사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시각이 있다.

문재인 정부는 이번에 친미 친일 우방 동맹에서 벗어나 친중 친소 친북의 방향 전환을 꾀하고 있다고 보는 시각과, 남북 통일을 위해서는 이념의 중립 지대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미국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중국과는 거리를 좁혀 나가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대사를 되돌아보면 한미동맹만큼 국제정치에서 성공적인 동맹을 찾아 보기도 어렵다. 문 정부 출범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좋은 동맹이 아니라 위대한 동맹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그러나 불과 2년만에 시련기를 맞고 있다. 우리 한미 동맹을 되돌아보면 많은 위기와 고비들도 있었다.

특히 1979년 박정희 대통령과 지미 카터 대통령의 한미 정상 회담은 한미간에 가장 불편했던 시절이다.
카터 대통령은 미군철수를 주장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카터에게 주한미군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지금까지 한미동맹은 한반도 안보의 가장 중추적 역할을 해왔다.
미국의 도움 없이 과연 우리가 중국, 북한, 소련, 일본 등의 안보 공세에 견디어냈을지 의문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베트남전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혈맹이라는 지위를 얻게 되었고 우리나라 내적으로는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참전으로 인해 도약의 일대 전기를 마련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역사를 되돌아 보면 미군이 철수함으로 말미암아 힘의 균형이 깨지면서 군사적, 경제적으로  심각한 결과를 맞이한 예가 얼마든지 있다.

필리핀이 그러했고, 베트남 또한 공산주의자들의 평화 공세에 고스란히 속아 하루 아침에 침몰하고 말았다. 1975년 월남전이 공산 측의 승리로 종식된 이후 김일성은 남한 공산화의 혁명 과업이 부실함을 호되게 지적했다는 설이 있다.

이에 대해 저들은 남한은 과연 무엇이 월남과 다른 가를 분석했으며 그 결과 남한은 자유 사상과 언론, 교회와 대기업 등의 다른 점이 있다고 판단하고, 중장기 적화계획을 세워 학교 교육을 장악하고 언론과 교회에 자갈을 물리는 공작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시중에 나도는 김일성 장학금도 이와 같은 맥락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그 근거로 2000년 8월 박지원 당시 문광부 장관이 언론사 대표 등 거물급 인사 46명을 대동하여 북한을 방문한 사실을 예시로 들고 있다.

교회에도 적지 않은 친북 성향의 목사들과 선교단체들이 있다.일부에서는 수많은 목사와 선교단체장들이 방북하여 약점 아닌 약점이 잡혔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이 하는 많은 주장들이 북한의 주장들과 일치하는 것을 보면 때때로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해방 후 70년, 어떻게 우리가 달려 왔는가?

이제 겨우 살만하고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도약하여 원조받는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성장한 이 시점에 그간 국가 발전에 큰 버팀목이 되어온 안보가 한미동맹의 균열로 인해 위협받지 않을까 심히 우려 된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3만6574여 명이 이 땅에서 대한민국 국민의 자유와 안전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전사했다.

 2015년 정전 62주년에는 미국 워싱턴에서 전사자 모두의 이름을 사흘에 걸쳐 부르는 ‘호명식’ 행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 적지 않은 관료와 정치인들이 친중모드에 휘말리고 있는데 6.25 전쟁 당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결국 우리의 통일을 가로 막고 민족분단의 상처를 준 장본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중국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광복 후 우리나라가 자유대한민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미국체제 즉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국가의 근간으로 삼은 것이고,

북한은 중국처럼 공산주의 정치 경제 체제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을 보면서도 친중국 노선을 주장하는 일부 정치인과 관료들을 보면 참으로 걱정이다.

이 자명한 진리와 증거가 지난번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시 국회에서의 연설에 너무나 잘 표현되어 있다. 본지에도 이 연설문의 전문을 영문과 한글로 게재한 적이 있다.

친구 간에도 의리가 중요하듯 국가 간에도 동맹은 매우 중요하다. 

한강상류 강북도로를 가다보면 워커힐 호텔 앞을 지나치게 된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한국에서 전사한 월튼 워커 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호텔을 짓고 이름을 워커힐이라고 한 것이다.

지금 이 곳을 지나가는 이들이 한국에서 전사한 워커 장군의 이름인 것을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 뿐인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도 참전했으며, 특히 벤프리트 사령관은 자신의 아들을  한국전에 받치고 벗의 나라 한국에 아들을 받친 것을 크나큰 영광으로 삼고 한국전을 지휘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아마도 60넘은 이들은 ‘자유의 벗’이라는 잡지를 기억할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6.25 전쟁 당시 미군장성의 아들 142명이 참전해 35명이 전사했다고 하니 4분의1이 희생된 것이다.

청문회 때마다 아들이 병역 관계로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이 망국적 사고는 언제쯤이나 종말이 날까.
전시도 아닌 평화시대에 말이다.

한미동맹이 위기를 잘 극복하여 세계 만방에 평화를 유지시키고 인류 공영에 이바지하는 대한민국이 되어야겠다.

이는 누가 뭐래도 불변하는 빚 진자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적 사명이다.
‘함께 가자’는 전직 미국 대사의 제안이 더욱 새롭게 느껴진다.

한미동맹을 위협하고 있는 일부 세력들에게 묻는다.
그들은 진정 자신의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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