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의 사전적 의미는 “부모를 잘 섬기는 일이다.”
이는 한나라의 허신이『설문해자』라는 자전류에서 해설한 의미로 우리의 국어사전에서도 그대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효(孝), 효도(孝道)에 대하여 ‘부모를 섬기다’, ‘효도하다’, ‘맏, 맏자식’, ‘본받다’ 이외에 ‘상복(喪服), 상복(喪服)을 입다’, ‘거상(居喪)하다’, ‘제사지내다’로 풀이한다.
언어는 행위가 드러나고,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만들어진다고 한다면, 효는 글자에서 보이기 전부터 있어 왔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역사에 드러난 효행 이전에 이미 효는 존재해왔다는 논리를 펴고 싶은 까닭이다.
전적에 드러난 효의 이야기는 B.C. 1,100년에서 600년대의 주나라 금석문을 비롯하여『상서』와『시경』등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이때로부터 시작된 효의 이야기는 통치 기술의 하나로 쓰이기도 하고, 민간에 인간의 사랑과 협력을 가르치는 인성교육예법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이런 연유로 효에 관한 이야기를 지독히 싫어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인권을 무시하고 가부장적이며, 봉건적이고, 권위적이라는 등등의 이유로 말이다. 현대는 과학적이고, 민주적이며, 자유주의, 개방화된 근대에 이 무슨 해괴한 전근대적 사고방식이냐는 논리로 말이다.
혹 이렇게 생각하시는 독자를 위하여 이제부터 제가 만난 효의 본질적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한다.
효의 실상은 문서로 나타나기 훨씬 이전에 확인할 수 있었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라샤펠오생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 화석을 연구한 결과 노령으로 관절염을 앓고, 어금니가 빠진 상태로 오랫동안 살았던 노인의 화석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1950년대 이라크의 샤니다르 유적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 화석 역시 젊어서 크게 다쳤고, 누군가의 보호아래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았다는 결론을 얻었으며, 터키북동쪽 조지아의 드마니시에서 발견된 인류 화석 역시 노인이 빙하기 전에 이가 다 빠진 상태로 살아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무려 1백8십만 년 전의 화석이야기다. 네안데르탈인 이야기다.
현생 인류도 우리의 이야기도 아닌데, 무슨 뜬끔 없는 이야기냐고 힐난할 수 도 있겠다.
효는 이런 배경에서 당연하게 우리의 정서로 드러난 것이지 인위적이거나, 정치적 목적으로 탄생된 이데올로기적 비판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다시 말해서 정치적이거나 강요에 의한 효가 아니라 인류의 시초부터 자연스레이 행하여지던 이타적 행동이 효의 근원이요. 이를 통한 사회 구성의 원리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구체적 문헌적 사례로 『구약성경』「출애굽기」에 있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를 소개한다.
이는 군집생활을 하던 시기에 대단위 군중의 합심을 위하여 효행의 원리가 필요했음을 알 수 있는 문헌이다.
또한 AD 62년경 쓰여 진 디모데전서 5장 4절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를 보더라도 효의 유용성을 알 수 있으며, 이 사건을 통하여 효의 장구함이 얼마나 긴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유가(儒家)에서 효의 이점을 정치사상의 배경으로 제공해 온 것과 달리 인간사회에서 협력하고 사랑하도록 하는 해법이 효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유가의 정치사상으로 인하여 효의 가치는 우리의 반만년 역사 속에서 면면히 이어오며, 지탄과 찬사를 동시에 받아왔다.
이제는 이러한 지탄과 찬사의 논란 대상이 효(孝)가 되기보다는 효(孝)로 함께하는 사회의 지렛대로 사용하자는 생각이 효에 대하여 들여다볼수록 느끼게 되는 매력을 소개하고 싶다.
효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신체를 잘 살피고 성공적 삶을 통해 부모의 이름을 드러내고, 그 이름을 후세에 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만 실천하여도 우리의 삶은 얼마나 풍부해지겠는가? 게다가 “부모의 뜻을 따르고, 사람의 일을 잘 계승하는 일”이 효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실천한다면, 나와 우리가족은 정말 멋진 사회의 구성원이 되지 않겠는가?
바로 이런 것들을 완성해나가는 것이 효일진대, 여전히 효가 논란거리가 될 여지가 있을까?
앞으로 이러한 매력에 함께 빠져 들며 효의 세계를 산책해나가시기를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