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고대와 중세 시대에는 격구(擊毬)라는 스포츠가 있었다.
골프공 만한 크기의 공을 격구채로 치는 전통 공놀이이자 마상재(馬上才)와 함께 기병을 양성하는 일종의 국가무예였다. 이는 페르시아에서 시작되어 실크로드를 거쳐 당나라 고구려 신라로 전해졌으며 특히 고려때 성행 했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격구의 달인급이었고 2대 정종도 은퇴후 이 스포츠를 매우 즐겼다고 한다.
조선 중기 이후부터 이 마상격구(馬上擊毬)는 말을 타지 않고 뛰어 다니며 하는 도보(徒步)격구로 간소화 되어 장치기 격방(擊棒) 등으로 불리는 백성들의 민속놀이 형태가 되었다.조선 세종은 특별한 날에는 종친들이나 신하들과 함께 밤새도록 격방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사실 격구는 서양의 폴로(Polo)경기와 유사한 마상 공놀이였다.격방은 타구(打毬), 봉희(棒戱), 장구(杖毬)라는 이름의 육상스포츠로 공을 막대로 쳐서 구멍에 넣는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골프의 원조라는 주장도 있으나, 풀밭이 아닌 마당에서 하는 스포츠라는 점에서 오히려 필드하키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장은 과연 언제 어디에 누가 만들었을까. 우리나라 골프장 역사는 구한말 개화기에 태동하여 일제 식민치하에 와서 완성되는 탄생과정을 거친다.
1896년 당시의 강원도 원산에 영국인들이 세웠던 최초 6홀 규모 골프코스가 있었다고 하며, 1921년 정조대왕 3남 문효세자의 능터인 지금의 서울 효창공원 자리에 건설된 9홀 규모의 효창원코스가 공식적 국내 첫 골프장이다.
이 코스는 일제 조선철도국이 철도 이용객들이 조선호텔에 묵을 때 이용하는 부대시설로 처음 '경성골프구락부' 라는 명칭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효창원코스 이용자가 점점 늘어나자 1924년 조선철도국은 경성철도국 지원금으로 서울 청량리 부근(지금 한국예술종합학교 자리) 이씨 왕가 능림에 16홀 코스를 건설하여 경성골프구락부를 이전했다. 그렇지만 10만여 평으로는 여전히 좁아서 같은 홀을 두 번 더 돌아야만 18홀 라운드를 맞출 수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조선 마지막 임금 영친왕은 일본 왕족이자 도쿄골프클럽 회원이던 부인 이방자 여사와 골프로 소일을 했는데 그녀는 영친왕 보다 골프를 더 잘 쳤다고 한다.
골프 애호가 영친왕은 청량리16홀에 대한 회원들의 불만이 쏟아지자 총독부 고관들과 함께 왕실 능터였던 뚝섬 부근 군자리 일대 넓은 땅을 골프장 부지로 하사하여 18홀 골프장을 조성케하고 경성골프구락부를 여기로 다시 이전했다.
당시 투자내용을 보면 영친왕은 군자리의 왕릉터 30여 만평을 무상대여하고 건설비 2만엔 외 3년간 매년 5천엔씩 보조를 해 주었다.
그 외 회원들이 2만엔, 부지 벌목대금 1만엔을 보태어 착공 2년만인 1929년에 완공하여 우리나라 최초18홀, Par 72, 6,160야드 챔피언쉽 코스 정규골프장을 개장하게 되었다. 설계는 1927년 일본오픈에서 우승한 전설적 일본 아마추어 골퍼 아카보시(赤星六郞)가 맡았다.
당시 회원 500여 명 중 한국인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실력은 일본인 회원들에 압도적으로 우세했다고 한다.
그러나 군자리 골프장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1943년 군사시설로 일제가 강제 징발하였고 광복 후에는 농민들이 무단점유하여 논밭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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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cc |
1950년 시작된 한국전쟁이 휴전되자 미군장교들이 휴일이면 군용기를 타고 일본 오키나와 기지로 가서 골프를 즐긴다는 말을 들은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의 안정적 상주를 위해 군자리 골프장의 재건을 지시한다.
그리하여 일부 재력가들의 후원으로 군자리코스는 1954년에 다시 복구되어 '서울컨트리클럽' 이라는 새 이름으로 재개장 되었다.
일제 당시 군자리에 살며 경성골프구락부 캐디로 일하던 한 소년이 한 일본인 회원의 도움으로 일본 골프유학을 하고 프로가 되어 1941년 일본오픈에 우승까지 하는데 그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 연덕춘(1916~ 2004)선생이다.
연덕춘 프로는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폐허화된 군자리코스 복원공사에도 주도적 역할을 해낸다.
1954년 5월 서울컨트리클럽은 사단법인(초대 이사장 이순용) 인가를 득하고 새출발 한다.
그런데 1972년 군사정권 하 대북밀사로 평양을 간 이후락 정보부장은 김일성을 면담하고 북한은 그에게 평양 시내 어린이공원을 관람 시켰다. 북한의 잘 사는 모습을 과시하려는 의도였다. 이 보고를 듣고 박정희 대통령은 당장 서울에도 어린이 전용 공원시설을 건설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급하게 어린이공원 조성사업을 추진하다 보니 부지가 이미 잘 갖춰져 있던 군자리의 서울CC가 징발 대상이 된 셈이다.
결국 군자리 서울CC 부지는 서울시에 수용 매각되었고 정부지원 하에 경기도 고양으로 옮긴 서울CC는 1964년 3월 착공, 9월18일 지금 구코스로 불리는 18홀 코스를 열었다.1970년 추가로 완공한 신코스 18홀은 일본 야기다케오(八木武夫)가 기본설계를 담당했다.
1964년 고양에는 이미 개장된 한양CC가 있었는데 한양CC는 개인이 대주주로 36홀 골프장을 만든 국내 첫 케이스다.
최초로 보증금(예탁금)을 받고 회원을 모집한 골프장으로 당시 그랜드호텔 안중희 사장과 연덕춘 프로의 합작설계 작품이다. 조경수를 이식할 필요도 없이 불필요한 나무만 베어내는 식으로 남겨둔 자생 조경수가 지금까지 자라고 있어서 자연적 조경미가 넘친다.
고양으로 온 서울CC는 1972년 한양CC의 사업주체인 한양관광(주)를 인수 하는데 그 배후에는 당시 서울CC 부이사장이던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이 있었다.
군자리코스가 없어져 골프장 없는 회원 신세가 된 상황에 한양CC 모회사 한양관광(주)는 사업부진으로 자금이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었는데 사업이 부진하도록 자금줄을 막았다는 설도 있다.
결국 한양CC는 개장 9년만인 1972년 8월 서울CC에 11억 원에 매각 되는데, 서울CC (현 서울한양CC)는 영친왕의 하사금으로 설립된 군자리의 경성골프구락부의 맥을 이어받은 우리나라 정통 원조골프장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CC는 명실상부 우리나라 골프장의 종가집 답게 당시 기라성 같은 정계 재계 문화계 거물급들로 이사장과 임원 회원들이 구성되었으며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이러한 배경의 유명 인사들로 회원들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CC가 우리나라 골프문화 발전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최초로 한국오픈골프선수권대회가 군자리 서울CC에서 열렸고(1958.9) 2002년 까지 서울한양CC 신코스에서 개최 되었었다.
1966년에는 한국골프협회(KGA)를 창립 했고, 한국프로골프협회(KPGA)도 서울CC 헤드프로였던 연덕춘 등 12명의 프로들이 조직했다.
서울CC가 한양관광(주)를 인수함으로써 서울한양CC는 서울CC 주주회원들이 실질적 주인인 셈이며, 주주회원들의 직선투표로 선출한 사단법인 이사장(현 27대 이 심)이 임원들과 한양CC 대표이사도 선임하고 있다.
서울CC는 비영리사단법인이며 회원들이 주주(Private Club)들인데 반해 한양CC 회원들은 입회보증금에 의한 이용권만 있는 회원제 골프장(Membership Club)의 회원들이란 점이 서로 다르며 이용요금도 차이가 있다.
영국 왕실이 영국 골프문화를 발전시킨 산파역할을 했듯이 한국골프도 조선왕가와 깊은 인연이 있으며 서울CC는 명실상부 한국 골프장의 원조이자 한국골프의 요람 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