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민정책포럼은 고(故)박세일 교수를 중심으로 만든 지식인 네트워크로 1996년 창립됐으며 좌우를 아우르는 통합형 정책 제시를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는 청와대 정책실장을 역임했던 백용호 이화여대 교수가 이사장을 맡고 있다. 백용호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새로운 변화의 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속도와 방법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변화하는 데 있어 지켜야 할 가치는 분명합니다. 자유와 평등, 공정과 정의 그리고 관용과 질서의식 등이 그것입니다.”라고 전하고 있다.
“독일통일은 접근과 교류 확대를 통해 동독의 변화를 추구해온 서독 사민당의 동방정책 추진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동독이 스스로 붕괴해 이뤄진 것입니다.”
염돈재 전 국정원 1차장은 14일 안민정책포럼(이사장 백용호)이 개최한 조찬포럼에서 ‘잘 못 알려진 독일통일, 그리고 한반도 통일에의 시사점’이란 주제 발표를 통해 독일통일에 대해 너무 잘못 알려진 정보들을 바탕으로 대북정책이 추진되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염 전 1차장은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동독접근을 통한 변화를 추구해 분단고통 완화와 민족 동질성 유지에 기여한 점은 있지만 통일의 원동력은 아니었다고 잘라 말했다. 염 전 차장은 오히려 동독주민의 시위로 공산정권이 망해서 가능했으며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은 아데나워 초대 총리이후 역대 서독 기민당(CDU) 정부가 친서방, 친미 기조하에서 추진한 힘의 우위 정책과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이 결정적 요인이 됐다고 주장했다. 당시 소련, 영국, 프랑스 등 주변국은 통독을 방해하는 세력이었지만 미국의 절대적인 지지와 서독정부의 탁월한 외교술로 통일을 이뤄냈다는 것이다.
염 전 차장은 또 동독에 대한 서독의 경제지원이 통일의 물꼬를 텄다고 알려져 있으나 연평균 20억 달러에 달하는 대동독 이전지출은 서독주민과 교회가 동독 인척과 교회에 제공한 물품이 77%를 차지하는 등 무상지원은 단 한 푼도 없었다고 소개했다. 염 전 차장은 서독의 동독 경제지원은 동독의 요구가 먼저 있어야 하고, 반드시 대가를 받아야 하고, 동독주민들에게 지원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3대 원칙하에서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염 전 차장은 통독방식은 완전한 흡수통일이었다며 우리가 추진하는 대등한 합의통일은 역사적인 전례가 없을 뿐 아니라 기름과 물이 섞일 수 없듯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주체사상에 입각한 사회주의체제가 함께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대한민국 주도하에 통일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염 전 차장은 통일의 모멘텀과 관련, 동독처럼 북한정권이 스스로 붕괴될 때 까지 기다려야 하며 대북정책도 이를 촉진하는 방향으로 추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염 전 차장이 발표한 강연 요약본이다.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통일됐을 때 독일국민보다 더 환호하고 기뻐했던 사람들이 우리 국민들이다. 우리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라던 독일이 통일됐으니 우리의 통일도 멀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통일 후 우리는 브란트의 동방정책, 화해·협력 정책이 독일통일의 원동력이 됐다고 생각, 독일통일 다음 해 서둘러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했고, 그 후 햇볕정책을 추진하면서 북한에 대규모 경제지원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북한의 핵 개발을 막지도 못했고, 독일통일 후유증을 목격한 우리 국민들은 통일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독일통일은 ‘20세기의 기적’이라 불린다. 남의 민족이 이룩한 기적을 보면서 우리도 하루 빨리 통일을 이뤄야겠다는 결의를 다지기보다는 우리 사회에 통일기피 심리가 널리 퍼져 있다는 것, 그리고 특히 최근에는 적화통일을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이는 상당 부분 독일통일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독일통일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친미 기조하 서독 힘의 우위 정책, 통독 이끈 원인
우선,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독일통일의 원동력이 됐다는 생각부터가 잘못이다. 브란트의 동방정책, ‘접근을 통한 변화’ 정책이 분단고통 완화와 민족 동질성 유지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독일통일은 서독의 ‘접근’으로 동독 공산정권이 ‘변해서’ 가능해진 것이 아니라 동독주민의 시위로 동독 공산정권이 ‘망해서’ 가능해진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독일통일의 원동력이라고만 생각했지 아데나워 초대 총리 이후 역대 서독 기민당(CDU) 정부가 친서방, 친미 기조하에서 추진한 ‘힘의 우위’ 정책과 미국의 적극적 지원이 독일통일을 가능케 한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는 점은 간과해 왔다.
우리는 서독이 동독에 적극적 경제지원을 한 것이 통일의 기반이 됐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연평균 20억 달러에 달하는 대동독 이전지출은 서독 주민과 교회가 동독 인척과 교회에 제공한 물품이 77%를 차지하고, 우리 같은 무상지원은 단 한 푼도 없었다는 점은 알지도 못하고 지내왔다.
통일 후 독일이 겪은 통일 후유증의 기억은 아직도 우리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
그러나 우리는 통일 후 15년이 지난 2006년부터 독일경제가 통일 후유증에서 벗어나 지금은 ‘유럽의 엔진’, ‘유럽의 지갑’으로 칭송받고 있다는 점은 간과하고 있다. 그 외에도 우리가 독일통일에 관해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독일통일의 교훈과 시사점도 엉뚱하게 잘못 받아들이고 있는 것들이 많다. 통일 초기 독일인들이 조급한 통일이 통일 후유증을 증폭시켰다고 얘기하자 우리는 점진적 통일이 유일한 통일방법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요즘 독일인들은 통일이라는 역사적 기회는 자주 오는 것이 아니므로 다시 옛날 같은 상황이 된다면 단 한 시간도 망설이지 않고 통일을 할 것이라고 얘기한다는 점을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대등한 관계에서 통일 이뤄진 사례 없어
우리 사회에는 서독의 흡수통일이 통일 후유증을 증폭시켰다는 이유로 우리는 흡수통일을 배제하고 대등한 통일, 합의통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대등한 관계에서 통일이 이루어진 사례가 없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리고 북한과 대등한 합의통일을 이룬다면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제도와 시장경제 체제 가운데 무엇을 양보하고 북한의 주체사상과 사회주의 중앙계획경제 가운데 무엇을 통일한국의 제도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이렇게 볼 때 대한민국 주도 하에 통일 하는 것은 불가피할 것으로 생각된다.
많은 사람들은 남북한은 독일보다 인구 격차는 적은 반면, 경제 격차는 훨씬 커 우리는 독일보다 훨씬 심각한 통일 후유증을 겪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독일은 ?동독 국유재산 매각이 적자를 기록해 통일비용 조달에 도움은 커녕 부담만 됐고, ?동독경제가 갑자기 붕괴돼 사회보장 지출이 격증했고, ?외국투자 유치 여건이 나빠 동독경제 재건이 지연되는 등 우리보다 열악한 조건도 많았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통일에 대해 환상적 기대를 가져서도 안 되지만 과도하게 우려할 필요도 없다. 통일비용 부담은 20여년에 불과하지만 통일의 혜택은 영원히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일을 위해서는 ▲대한민국을 북한주민의 동경으로 건설하고 ▲굳건한 안보태세와 경제력으로 힘의 우위를 유지하면서 ▲김일성 3대 세습체제의 실체와 의도를 정확히 인식하고 ▲북한의 개혁·개방과 민주화에 노력하면서 ▲평소 경제 펀더멘털과 재정 건전성과 재정 탄력성을 강화해 나가는 등의 노력을 지속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경구 기자